청구도 전국지도 
 
 
김정호가 만든 『靑邱圖』의 異本은 현재 9개 남아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내용적으로는 3개의 유형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중 본 『청구도』(古4709-21)는 4권으로 되어 있으며, 남북으로 총 29개의 층, 동서로는 22개의 판으로 구분되어 있다. 각 층판의 면은 남북 100리와 동서 70리의 동일한 크기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책의 크기는 세로와 가로가 31.5cm×21.5cm이다. 이 중 제26층과 제27권에는 아무런 내용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1권에서 4권까지 1·2·3·4층으로 시작하여 각각 4를 더한 층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1권과 2권의 ‘본조팔도주현총도’ 오른쪽의 주기에 ‘그 나머지도 이와 같으며, 上下 두 권을 참고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어 실제로는 4권이 아니라 2권으로 되어 있었는데, 후대의 필사자가 4권으로 재편했을 가능성이 높다. 1권의 맨 앞쪽에는 甲午년인 1834년(순조 34)에 최한기 (1803-1879)가 쓴 『청구도』의 서문인 ‘靑邱圖題’가 붙어 있다. 그러나 『청구도』 이본 중의 하나이며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청구요람』에 수록된 김정호의 ‘靑邱圖凡例’는 들어 있지 않다. ‘청구도범례’에는 본 지도책의 내용과 상충되는 측면의 기록이 있다. 첫째, 산줄기로 표현하지 않고 단지 산의 봉우리만 그려넣는다고 했는데, 본 지도에는 산줄기로 표현하였다. 둘째, 東方諸國圖·三韓圖·漢四郡圖·三國圖는 여러 사람의 고증이 온당치가 못해 삭제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본 지도에는 동방제국도와 사군삼한도 및 삼국도가 수록되어 있다. 셋째, 戶口·田結·穀總·軍丁 등을 순종 무자년(1828) 備局都錄을 기초로 기입해 넣는다고 했는데, 본 지도에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넷째, 京까지의 거리를 적어넣는다고 되어 있는데, 본 지도에는 없다. 다섯째, 京은 특별히 중요하여 五部全圖를 첫머리에 기록한다고 했는데, 본 지도에는 오부전도가 없다. 이런 측면들을 고려해 볼 때 본 지도는 ‘청구도범례’가 작성되기 이전에 제작된 『청구도』로 추정된다. 이런 추정에 가장 분명한 근거가 되는 것이 東方諸國圖·三韓圖·漢四郡圖·三國圖에 대한 기록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김정호는 분명히 이런 지도를 이미 그린 적이 있다고 볼 수 있고, 다만 나중에 제가의 고증에 문제가 많아 삭제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런 지도를 삽입했던 『청구도』가 이미 있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김정호는 『청구도』를 한 본만 만든 것이 아니라 최소한 2개 이상을 만들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최종본은 ‘청구도범례’가 들어가 있는 것, 그 중에서도 ‘청구도범례’의 내용에 부합되도록 그린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이 점에서 본 지도는 ‘청구도범례’가 실려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 다른 것이 많기 때문에 최종본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청구요람』은 ‘청구도범례’가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청구도범례’의 것과 동일하게 되어 있어 최종본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본 지도책은 군현은 큰 □ 모양(牧府), 큰 ◇ 모양(郡), 큰 ○ 모양(縣) 등의 범례 기호를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군현에서는 범례가 틀리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어 꼼꼼한 검토가 부족함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지도에서 『청구요람』처럼 고구려(句), 백제(濟), 신라(羅), 고려(麗)의 지명을 따로 적어두지는 않았다. 다만 강릉이나 춘천 등 일부 지역에서만 이런 방식을 사용한 경우가 나타나고 있다. 이런 지역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의 지명뿐만 아니라 삼한시대의 지명까지 적어놓아 앞쪽에 사군삼한도가 붙어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본 지도의 대부분처럼 역사 지명을 적어놓지 않은 『청구도』와 역사 지명을 『청구요람』보다 더 오래 전의 삼한 시대까지 적어놓은 『청구도』가 있었을 가능성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청구요람』처럼 역사 지명과 樓亭과 같은 문화적 정보가 새롭게 추가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추정이 맞는다면 『청구도』는 김정호에 의해 최소한 3개의 이본이 만들어졌다는 결과가 된다. 범례의 측면에서 본 지도책에서 사용된 것은 진보의 작은 ◇ 모양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세로의 직선이 그어진 것은 종3품의 첨사와 정4품의 만호가 파견된 진보, 세로의 직선이 없는 것은 종9품의 권관과 별장이 파견된 진보로 구별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구별이 들어맞지 않는 곳이 많으며, 심하면 작은 ◇ 모양이 아니라 작은 ○으로 표시한 곳까지 있어 일관성이 떨어지고 있다. 이런 모습은 후대의 필사자가 잘못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쉽사리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진보의 표시에서 파견된 무관의 명칭 중 한글자씩을 일관되게 써넣은 『청구요람』에 비해서는 고민의 수준이 많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본 지도책은 하천의 유로, 지명, 해안선, 섬 등의 내용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본 사이트의 『조선지도』와 『팔도군현지도』계통과 상관 관계가 높다. 이 계통의 지도는 현재 규장각 이외에도 7개 정도의 지도책이 더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본 지도책은 그 중에서도 국립중앙도서관의 『해동여지도』의 것과 거의 동일하다. 다만 앞의 지도책이 군현별로 다르게 그린 반면에 본 지도책은 모두 연결해서 그렸다는 점이 다르다. 모든 군현을 연결해서 그렸다는 점에서는 大阪府立圖書館 소장의 『조선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조선도』는 범례의 사용이라는 측면에서 『해동여지도』와 거의 동일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본 지도책은 군현과 진보에서 많이 세분화되어 있다. 다만 본 지도책이 앞의 7개 지도책과 내용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적인 필사관계에 있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특히 형식적으로 다른 부분이 본 지도책에 일부 나타나고 있는데, 이런 부분에서는 앞의 7개 지도책과 내용적으로 다른 부분이 발견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본 지도책은 앞의 7개 지도책 계통을 참조하여 제작되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최한기가 작성한 ‘청구도제’뿐만 아니라 김정호의 ‘청구도범례’에는 기존 지도의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는데, 방안의 크기가 다르고 지도 위에도 그려져 있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이런 내용에 가장 부합되는 것은 위의 7개 지도책 중에서 『해동여지도』이다. 『조선지도』와 『팔도군현지도』가 1770년 이전의, 『해동여지도』는 장진부의 설치(1787년) 이전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반면에 『조선도』는 장진부가 설치되었다는 사실은 반영되어 있지만 읍치의 위치나 경계선 등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본 지도책에는 후주부(1823년)가 설치되는 시기까지의 내용이 반영되어 있어 앞의 지도책들을 그대로 편집한 것이 아니라 시기적 변화 양상을 담아내려 노력하면서 편집한 것이다. (이기봉)